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발간사

19세기 중엽부터 우리 사회에 격랑을 몰고 온 인문·사회과학의 개념들에 관하여 혼돈 상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봅니다. 민족과 민족주의, 근대국가와 주권, 자주와 독립과 같은 핵심개념들조차 비학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리적 표현’에 불과하다고 멸시받던 이탈리아의 민족과, 부활을 지향하는 정치운동인 민족주의 주체의 민족은 서로 구별됩니다. 근대국가는 서유럽에서 등장한 독특한 정치 사회의 한 형식이며 이 형식을 지향하는 것이 주권 개념입니다. 주권은 서양의 중세 사회나 동양의 사대 질서에서 보는 통치권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입니다. 자주와 정교금령은 사대 질서의 개념이며, 독립과 내치외교는 서양 공법 질서의 개념입니다. 이런 역사적 개념을 서로 구별하지 않는 것은 반(反)역사적은 아닐지라도 비(非)역사적입니다. 인문·사회과학의 개념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운동을 함축하고 있는 역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개념사 연구는 정치·사회제도의 분석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개념들은 장소(topos)와 시간(tempo)에 따라 그 성격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지적 작업을 수행하는 데 세계 정치의 중심지역 학자들보다 우리는 훨씬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이 한국학계의 고민입니다. 우리는 외국 학자들처럼 개념의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분석, 의미론이나 명의론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장소들의 개념들의 충돌을 연구해야만 합니다. 더욱이 우리의 한반도는 독특한 역사적 성격을 지닌 장소입니다. 유럽 열강의 세계 팽창 대상지역 중에서도 오지(奧地)에 속하는 곳입니다. 오지의 특징은 외래 개념에 대한 저항과 오해가 그 어느 지역보다 강렬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항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지켜 온 개념들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른바 가정(假晶 pseudomorphosis)의 현상이 두드러진 곳입니다. 가정은 광물이 그 내부구조에 따른 본래의 결정형과는 다른 결정형을 나타내는 현상을 지칭하는 광물학의 용어입니다. 다른 장소의 개념이 전파되는 경우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는 사회 현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슈펭글러(O. Spengler)가 광물학에서 차용한 낱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는 중국이나 일본과도 판이한 역사적 경험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오지라는 장소의 특징은 시간의 역사적 성격에도 반영됩니다. 세계정치 중심지역의 개념들이 뒤늦게 전파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지와 세계사의 접목은 세계사 흐름의 최후 단계에 이루어져서 오지의 세계화는 난항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한반도의 장소적인 특징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같은 동북아 질서에 속하였던 중국과 일본의 변모로 동북아 3국 사이에도 개념의 갈등이 야기됩니다. 교린 질서 안에 살고 있던 한국과 일본은 1868년부터 개념의 충돌이 시작되어 1876년까지 8년의 위기를 맞습니다. 이 위기를 거치면서 일본은 개념의 세계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이런 개념에 의한 담론을 세계에 전파합니다. 같은 사대 질서에 살고 있던 중국이 1880년을 전후하여 사대 질서의 변형을 주장해 한국은 중국과 충돌하고 그리고 고민합니다. 유길준의 ‘양절체제(兩截體制)’라는 천재적인 직관은 사대 질서의 개념들을 서양 공법 질서의 개념으로 전환시키려는 중국에 대한 우리의 처절한 저항입니다.

이런 역사적 특징을 지닌 한반도라는 장소에서 인문·사회과학의 근대적인 기본개념 형성에 중요한 시기(tempo)는 1850년에서 1950년에 이르는 100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질 문명권과 만나 충돌하면서 동시에 동북아 3국 사이에 개념의 마찰이 병행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개념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19세기 중엽 이전 우리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 현상들이 전파된 현상을 가리켜 우리에게는 생소한 개념들이 있습니다. 유럽 학문체계의 이런 개념들에 대한 오해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둘째,19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개념들이 그 본래의 내용이 굴절되어 새로운 현상을 지칭하게 된 개념들이 있습니다. 본래의 의미와 굴절된 내용이 혼재하게 됩니다.
셋째,1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사라진 개념들이 있습니다. 통용의 중단이 일시적인 것도 있고 다시 부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건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는 사회적인 격동이 있습니다.

이런 개념사 연구를 우리는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서술해야 합니까?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분석을, 그리고 장소의 문제에 관해서는 비교문명권의 입장에 입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이런 방법론에 따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주요 개념들을 서술할 것입니다. 먼저 동서양의 어원을 고찰합니다. 어원은 통시적 분석의 출발점입니다. 개념이 19세기 이전에도 동양 세계에서 통용된 경우에는 그 동양적인 의미와 19세기 이후의 변천 과정을 추적합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 새로 동양에 전파된 서양의 개념인 경우에는 서양 세계에서 통용된 의미와 동양에 전파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그러나 서술의 중심은 한반도라는 장소에서 일어난 개념들의 해석, 번역, 굴절, 선택, 그리고 오해를 포함한 모든 충돌 현상에 관한 분석입니다. 그리고 1950년 이후 이들 개념들이 한국 학계에 정착되는 데에 따르는 오늘날의 문제점들을 제시합니다. 정착 문제는 우리 학계의 수준을 폭로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개념사 연구는 인문·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 걸친 연구입니다. 이른바 ‘전체의 역사(histoire totale)’를 시도하는 지적 작업입니다. 이런 학술 사업을 진행하기에는 우리 학계의 수준이 아직 일천하다고 걱정하는 소리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념사 연구 자체에 관해서도 회의와 냉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장소(topos)의 인문·사회과학 기본개념에 관한 연구는 단지 학문상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 연구는 우리의 생존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개념의 정확한 인식에 의한 학술적인 담론의 세계화는 21세기에 우리가 한반도에서 한국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담론의 세계화를 이룩하지 못한 것이 1910년의 불행을 자초한 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 8월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한국개념사총서」 편찬위원회위원장
김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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