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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인문한국 사업(HK) 심포지엄

관리자 | 2009.08.26 00:00 | 조회 406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 사업(HK) - 동아시아 기본개념의 상호소통 사업

제2회 인문한국 사업(HK) 심포지엄
- 동아시아 개념 충돌의 현장

1. 기획 취지

한 림과학원은 2007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인문한국(HK)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동아시아 기본개념의 상호 소통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 니다. 한림과학원은 지난 2009년 4월에 “개념소통의 철학적 기반과 역사적 경험”이라는 주제로 제1회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동서양 의 개념론에 내재된 소통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한편, 그러한 보편적인 틀로써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반추해 보았습니다. 
저희 는 이번 제2회 심포지엄의 주제를 “동아시아 개념 충돌의 현장”으로 정했습니다. 19세기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 중심의 전 통적 질서가 해체되고 서구의 근대 문명이 이식되면서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곳에서는 서구의 근대 적 제 개념이 수용되면서도 항상 반발, 굴절, 변용의 과정을 동반했습니다. 
동아시아 근대사의 복잡성과 역동성을 포착하기 위 해 저희는 ‘충돌’에 주목했습니다. ‘개념 충돌’이란, 개념을 둘러싼 ‘인식’의 충돌이자 그러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 간의 충돌입니 다. 이러한 충돌의 현장성에 육박해 가면서도 그 개념에 내재된 소통적 가능성의 발굴을 포기하지 않을 때, 동아시아의 경험이 가 진 보편성과 특수성을 온전히 드러내고 과거에 대한 ‘창조적 해석’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나아가 이런 노력을 통해 오늘날 동아시 아 국가 간 소통을 촉진하는 데에 도움이 될 어떤 시사점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주제로는, 한반도를 무 대로 동아시아 삼국 간, 혹은 국가 내의 집단 간에 ‘개념’의 인식 차이로 발생한 충돌 현장에 주목했습니다. 다만 이런 소재를 다 루는 접근방식은 다양하게 열어 두었습니다. 1899년 한청조약 전후한 시기의 영사재판권을 소재로 다룬 은정태의 연구는 당시 한청간 의 충돌을 개념의 충돌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이해관계의 충돌로 봐야할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질문합니다. 김윤희는 ‘한 일합방 청원’을 둘러싼 논란과정에서 한국 식자층이 보인 다양한 국가구상을 서구 근대 국가 개념의 ‘균열상’이라는 차원에서 포착함으 로써, ‘동양’ 담론과 ‘민족’ 담론이 이 균열상에 어떻게 개입되어 있었는가를 고찰합니다. 전상숙은 3.1운동기 심문조서에 나타 난 일제당국과 민족대표 간의 문답 속에서 ‘평화’ 개념에 대한 인식상의 충돌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봄으로써, 보편적인 ‘민족자결’ 과 여기에 전제된 ‘평화’ 개념 등이 주체들이 처한 관계ㆍ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수용되고 顚倒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허수는 식민 지기 좌익 언론과 천도교 신파가 ‘종교’ 개념에 대해 인식을 달리하며 서로 충돌했지만, ‘계몽주의적 가치에 대한 이탈’이라는 점에 서 양자 사이엔 공통분모가 있었고, 그것은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두 입장을 상호 소통시킬 수 있는 여지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2. 일정

○ 일시 :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13:00~18:00
○ 장소 : 한림대학교 연암관 4층 인문대학 강당

13:00 등록
13:30∼13:40 인사말(김용구 원장)

제1부: 발표(사회: 이경구, 한림대)
13:40∼14:10 개념의 충돌인가? 해석의 문제인가? - 영사재판권의 ‘청심권’ 조항을 중심으로 - (은정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14:10∼14:40 상상의 동양과 주권, 정부, 인민(국민) 개념의 균열 (김윤희, 한림대)
14:40∼14:50 휴식
14:50∼15:20 ‘평화’의 적극적 의미와 소극적 의미 - 3ㆍ1운동기 심문조서에 드러난 ‘민족대표’의 딜레마 - (전상숙, 연세대)
15:20∼15:50 일제하 ‘사상 논쟁’에 나타난 ‘종교’개념의 충돌 - 천도교와 좌익 언론 간의 논쟁을 중심으로 - (허수, 한림대)
15:50∼16:00 휴식

제2부: 종합토론(사회: 박찬승, 한양대)
16:00∼17:00 패널질의 응답
17:00∼18:00 집중토론: 이은자(경원대), 이나미(연세대), 이태훈(연세대), 장석만(한국종교문화연구소)


3. 발표 요지

(1) 개념의 충돌인가? 해석의 문제인가? - 영사재판권의 ‘청심권’ 조항을 중심으로 - (은정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대한제국과 청국은 1899년 한청조약 체결로 상호 간에 영사재판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조항의 해석 및 적용 과정에서 적지 않은 충돌이 있었다. 
영 사재판권 조항은 민ㆍ형사 사건에서 외국인이 피고이고 내국인이 원고인 경우에 이루어지는 재판절차에 관한 것이었다. 타국 영도에 주재 한 영사는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자국 법률에 따라 자국민(피고)를 재판할 수 있는 권한[承審權]이 있었다. 이때 주재국 관리 는 이 재판에 참여해서 외국인 피고를 심문할 수 있는 권리[聽審權]가 있었다. 외국인이 원고이고 내국인이 피고일 경우에도 이러 한 절차는 준용되었다. 그런데 이 청심권 행사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규정이 부족해서 논란의 여지를 제공했다.
본 발표에서는 대 한제국기 최대의 민사소송 가운데 하나로서, 조선인 팽헌주가 청국 상인 강운경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던 사건, 즉 ‘彭姜 案’에서 영사재판권 조항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청국은 한국지방관의 청심권 행사를 부정했다. 조선은 청심권 행사를 정당 한 권리행사라 주장했다. 
기존의 연구는 청국의 태도를 중국의 법 문화, 즉 “청의 법정에서는 증인을 소환ㆍ심문하는 권한 이 승심관에게만 존재했다”는 사실로 설명했다. 이렇게 본다면 청국와 대한제국의 청심권 논란은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지 기 쉽다. 그러나 본 발표는 청심권을 둘러싼 양국의 충돌이, 청심권에 대한 개념적 이해의 차이 때문에 발생했기 보다는, ‘자국 민 보호’라는 영사재판의 본질적 요소를 지키기 위해 조약문을 편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본다. 

(2) 상상의 동양과 주권, 정부, 인민(국민) 개념의 균열 (김윤희, 한림대)

1909 년 12월 일진회가 제기한 ‘합방청원’을 둘러싸고 국내 언론 간에는 ‘한일합방’을 찬성하는 국민신보와, 이에 반대하는 황성신문ㆍ대 한민보ㆍ대한매일신보 측이 서로 대립했다. 이 과정에서 ‘보호국’ 체제에 대한 인정 여부와 ‘한일합방’에 대한 찬반 여부에 따라 다 양한 국가상이 드러났다. 본 발표는 근대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요소, 즉 주권, 정부, 인민 개념이 ‘국권 상실기’의 한국민에게 어 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표상되고 있었는가를 고찰함으로써, ‘동양’ 담론과 ‘민족’ 담론이 근대적 ‘국가’ 개념의 ‘균열상’에 어떻 게 개입되어 있었는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을사조약 이전의 유길준이나 독립신문ㆍ황성신문은 독립주권과 통치권으로 표상되는 서구 의 ‘근대주권’개념을 수용했다. 이러한 ‘근대주권’을 온전하게 확보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고, 이를 위해서 인민을 통합하는 주체 로서 ‘정부’가 설정되었다. 그러나 국권 상실기에 대처하는 입장 차이로 인해 이러한 통합적 국가상은 변형과 분화를 보였다. 
일 진회가 내건 합방청원 이유와 유생층의 합방 찬성론에서는 ‘독립주권의 포기’로 상징되는 근대주권 개념의 분열이 나타났다. 또한 보호 국 체제 하의 이완용 내각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정부’는 더 이상 통합주체로 상정되지 못하고 ‘일본에 이양’해야 할 것으로 인식 되었다. 그 결과 국가상은, 한편으로는 ‘동양제국’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인 행복추구를 도모하는 ‘개인’에 의해 형해화되었 고, 왕을 중심으로 하는 내정자치권의 확보가 중시되었다. 
황성신문ㆍ대한민보는 ‘보호국체제’를 ‘현실’로 인정하고 일본이 맹 주가 되는 ‘동양주의’를 긍정했다. 이들에게서도 근대주권 개념은 역시 분열상을 보였으나, 일진회 등과는 달리 독립주권은 ‘미래 에 달성될 것’으로 상정되었다. 따라서 그들 역시 내정자치를 주장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동양’ 속의 국가ㆍ민족적 경계를 명확히 하 고자 했고, 내정의 통치에서 왕과 인민 사이의 균형 유지자로서 ‘정당’을 중시했다. ‘근대주권의 권위형식’이 상실되는 문제는, 정 당정치를 유지하려는 관심에 밀려 부차화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보호국체제’를 부정했고 이완용 내각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 았으며, ‘한일합방’에도 반대했다. 이런 태도로 인해 그들은 황성신문 등이 ‘보호국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동원한 동양주의에 의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신의 국가’를 중시하고 그것을 ‘인민의 정신’과 결합되는 것으로 상정했다. ‘정신의 국가’는 비록 근대주 권의 권위형식을 가지진 못했으나, 국가와 인민의 결합을 상정하는 인식은 향후의 정부, 즉 근대주권의 권위형식을 유지하는 정부를 새 롭게 구상하도록 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단체’를 중시했다. ‘단체’는 인민의 단결로 구성되는 국가의 모태였고, 정부는 ‘단 체’의 의지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것으로 상정되었다.

(3) ‘평화’의 적극적 의미와 소극적 의미 - 3ㆍ1운동기 심문조서에 드러난 ‘민족대표’의 딜레마 - (전상숙, 연세대)

 3․1 독립선언 후 일제 당국은 민족대표를 심문하면서, ‘윌슨의 민족자결선언’이 조선 독립과 무관했음을 미리 알았는지 여부와, 공약삼장 의 “최후의 일인까지”가 항일 폭력운동을 뜻하는지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본 발표는 이러한 추궁과 답변 과정에서 양자 간에 ‘평 화’ 개념을 둘러싼 인식상의 차이와 충돌이 노정되었다고 보고, ‘평화’ 개념을 둘러싼 입장차이, 민족대표들이 가진 딜레마 등을 살 펴보고자 한다. 
‘민족자결선언’은 식민지 약소민족에게 독립의 서광으로 비춰졌으나, ‘전쟁종식과 민주주의 영구평화계획’이라 는 이상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었다. 민족대표들은 민족자결 원칙에 기초한 민족 독립을 명백히 지향했으나 식민 지배자인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민족자결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인식이 부 족했다. 민족자결선언에 관한 일제의 집요한 추궁은, 일제와 민족대표 양자가 기대고 있던 ‘평화’ 개념의 차이에 기인하고 있었다. 
민 족대표는 독립을 지향했으나 그 독립에 대해, 식민지배의 구조를 顚覆해서 피식민지 민족이 처한 갈등상태를 해소함으로써 달성할 것으로 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북아에서 압도적 힘을 가진 일본의 지도적 역할과 우위를 인정한 위에서 민족자결을 선언하고 일제와 의 평화적 공존방식을 모색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지향한 평화는 ‘소극적 평화’에 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당국 은 이러한 민족대표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이 걸어온 경험과 그로부터 연유한 평화 개념 과 관계 깊었다. 제국주의 일본에게서 국가의 평화는 그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구조적으로 극복함으로써만 달성되는 것이었다. 이 는 곧 ‘적극적 평화’에 해당했다. 이처럼 ‘평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있던 일제 당국은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을 곧 무 력에 의한 분리독립으로 인식했고, 민족대표들이 답한 ‘소극적 평화’에 해당하는 인식을 한갓 ‘修辭’로 생각했다. 일제가 ‘공약삼 장’의 ‘최후의 일인까지’라는 문구를 집요하게 추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이처럼 민족대표의 ‘평 화’ 개념이 일제 당국의 그것과 차이가 있었던 사실은, 민족대표가 구상하는 ‘평화’의 실현에 딜레마적 상황을 제공했다. ‘민족국가 의 수립과 이에 기초한 대내외적 평화체제 수립’을 19세기 이래 각국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목적으로서의 평화’라 규정한다 면, 이러한 평화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일제나 민족대표 모두 긍정적이었으나, 그것이 ‘일본 제국-식민지 조선’이라는 현실 관계 속 에서 제기될 경우 모순적이고 갈등적인 의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당시 민족대표들이 ‘목적으로서의 평화’를 이룩하 기 위해 ‘평화’를 ‘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면, 그것은 자신들이 견지했던 ‘소극적 평화’를 부정해야 했다. 민족대표들은 현실에 서 그런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다. 

(4) 일제하 ‘사상 논쟁’에 나타난 ‘종교’개념의 충돌 - 천도교와 좌익 언론 간의 논쟁을 중심으로 - (허수, 한림대)

1930 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 좌익 언론과 천도교 신파 간에 전개된 ‘사상 논쟁’은, 대외적으로 소련 및 일본의 반종교운동, 대내적으로 는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사회주의자와 천도교 신파가 갈등을 벌이던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 논쟁은 천도교청년당 측의 ‘조선영도 권 요구’ 주장에 좌익 언론이 반발하면서 본격화되어, 천도교의 교리, 역사, 조직 등 포괄적인 주제가 다루어졌다. 
좌익 언 론측은 ‘과학성ㆍ계급성(당파성)’에 입각한 ‘反종교개념’의 견지에서 천도교를 비판했고, 천도교 신파측을 대표한 김형준은 ‘신종교’ 와 ‘기성종교’를 구별하고, ‘역사성’(종교진화론)과 ‘현실성’(식민권력과의 대립, 민중적 기반)의 측면에서 ‘신종교’로서 천도교 가 지닌 정당성을 옹호했다. 김형준의 ‘신종교’ 개념은 1910년대 후반 이돈화의 ‘신종교’ 개념에 젖줄을 대고 있었다. ‘종교 와 과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신종교’의 내용을 고찰하면, 김형준의 그것이 다소 방어적 차원에서 제기되었고 개념적 외연이 좁아지 긴 했지만, 양자의 ‘신종교’ 개념은 ‘로맨티시즘적 종교 개념’으로 부를 만하다. 
‘사상 논쟁’은 식민지기 종교 논의지형 을 ‘종교-정치’ 구도 일변도에서 벗어나 ‘종교-과학’의 문제를 논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상 논쟁’ 이전에는 천도교가 ‘과 학’을 종교에 종속시키면서 ‘敎政一致’를 지향하며 행동반경을 사회운동 방면으로 확장해 나간 반면, ‘사상 논쟁’에서는 좌익 언론 이 ‘과학’의 이름으로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천도교를 배제하고자 했다. 그런데 근대 학문적 토대가 미비된 식민지 상황에서 ‘종교’ 를 둘러싼 지식ㆍ담론은 허약한 기반을 면하기 어려웠다. 
‘사상 논쟁’의 두 당사자가 ‘종교’ 개념에 관한 인식에서 서로 충 돌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좌익 언론은 ‘과학’ 담론을 다시 계급투쟁에 종속시킴으로써, 그리고 천도교 측은 ‘종교’ 너머 ‘과학’ 까지 회통하는 ‘전체성’을 지향함으로써, 양자는 ‘계몽주의적 사유로부터의 이탈’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러한 공통점은 두 입 장 간에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한 잠재성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사상 논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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