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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차 ≪독립신문≫을 통해 본 군주의 표상과 고종의 실체
<제48차 동아시아 개념소통 포럼>
일 시 : 2011년 12월 8일(목)
장 소 : 한림과학원 회의실(연암관 2633호)
【제1발표】 ≪독립신문≫을 통해 본 군주의 표상과 고종의 실체
발표자 : 김성혜(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제2발표】청년 루쉰(魯迅)의 근대 '문명'에 대한 이해
발표자 : 서광덕(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 발표 요지 -
≪독립신문≫을 통해 본 군주의 표상과 고종의 실체
≪ 독립신문≫은 당시 정세를 올바로 전달하고 백성들을 계몽함과 동시에 민간과 정부 사이의 소통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며 창간되었다. 그 들은 먼저 일반 백성과 지식인 계층인 자신들을 분리해 계몽을 선도할 스스로의 입지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국내외 상황을 자세히 보도 하고 시대에 필요한 일들을 개진하며 정부를 향해 민간의 고충을 알려 나갔다. 또한 현 정치담당자의 실태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 고 개선을 요구했다. 이 때 ≪독립신문≫에서는 정부와 군주를 분리하고 현 정권의 실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군주를 상정하고 자 했다. 때문에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구별되는 위민하고 자애로운 어버이이자 국가 통합 구심점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할 군 주가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선(대한제국)은 총체적인 국가 위기에 빠져 있었다. ≪독립신문≫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민 을 단결시키고 충군,애국을 이끌어낼 국가 통합의 구심점인 초월적 존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지향과는 달 리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고종의 국정장악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독립신문≫은 애민하고 자애 로우며 타국과 대등한 권위를 가져야 할 군주 표상에 집중하며 고종과의 직접 소통을 소홀히 했다. 또한 자신들의 의도대로 고종과 정 부와의 분리를 꾀하며 고종을 현실 정치에서 제외시키고자 했다. 이는 갑신정변·갑오개혁 세력들이 고종의 실질적인 통치권 제한을 시도 하다가 고종의 반발로 정계에서 도태된 것과 같은 전철을 밟는 것이었다. 결국 ≪독립신문≫이 제시한 군주 표상이 고종과의 소통 부재 를 야기시켰고, 군주 표상과 고종 실체와의 괴리가 심각한 상황에서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양측의 정치적 이해관계 는 극한 대립 국면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청년 루쉰(魯迅)의 근대 '문명'에 대한 이해
루쉰 (魯迅, 1881-1936)은 이제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은 중국근대문학가다. 그의 작품 <아Q정전>이 청소년 필독서 목 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이를 방증하는 예일 것이다. 아울러 국문학 연구자들내에서도 루쉰을 언급하는 경우가 느는 것 은 최근 루쉰의 사상과 문학에 대한 학술적 관심을 유도하는 기제들이 발생한 것과 연관이 있다. 그것은 몇 년 전부터 루쉰을 일본 에 소개한 장본인이자 그를 통해 일본근대사상가로서 자리한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또 그를 대상으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시키며 동 아시아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쑨거(孫歌) 그리고 최근 활발한 글쓰기를 통해 현대 중국지식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사상계에 자신의 사 고를 발신하고 있는 왕후이(汪暉) 등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중국근대문학가 또는 혁명가 루쉰이란 종래의 평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루쉰 에 대한 이해를 재촉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발표는 이러한 특징을 20대 루쉰의 글에서 확인해보고자 한 다. 그가 세상에 루쉰이란 필명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1918년 잡지《新靑年》에 <狂人日記>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 면서부터이다. 하지만 1918년 이전에 글쓰기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 매체(잡지)에 글을 발표한 것 은 1903년이었고, 그 이후 1908년까지 몇 편의 글을 《河南》등의 잡지에 기고했다. 그 이후 10년간 침묵했는데, 본 발표 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1905년을 전후로 하여 발표한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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