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개념소통 번역시리즈

  • 학술지
  • 東亞觀念史集刊
  • 개념소통 번역시리즈
  • 도서명 : 음빙실자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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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도서명 : 음빙실자유서
    • 2.저자 : 량치차오
    • 3.출판사 : 푸른역사
    • 4.발행일 : 2017.04.29



    근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필독서 [음빙실자유서飮氷室自由書]
    1907년의 최초 번역 이후 다시 번역되다!


    20세기 초 ‘언론계의 총아’,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불린 량치차오梁啓超,
    문명 구상에서 일상의 단상까지, 중국의 고전과 불경에서 서양 사상가까지
    종횡무진 빠른 행마로 동서고금을 논한다!


    청년 량치차오의 일본 망명

    1898년 9월 21일 스물여섯 살 청년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른바 ‘백일유신’이라 불리는 변법운동이 서태후 일파의 정변으로 실패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승 캉유웨이康有爲와 더불어 ‘강·양康梁’이라 불리며 변법자강을 주도했었다. 량치차오는 이날의 도피가 무려 15년에 걸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실의에 젖어 떠난 망명길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근대 서양 사상을 수입하는 창구였고, 수입한 사상을 자양분 삼아 근대 국민국가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다. 량치차오는 일본에 물밀듯 들어온 서양 사상을 탐욕스럽게 섭취했고, 일신日新하는 일본의 면모를 속속들이 관찰했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종횡으로 달리는 수십 편의 주옥같은 글을 썼다. 그 글들은 1903년 이후 중국은 물론 일본과 한국에서 [음빙실자유서飮氷室自由書](이하 ‘자유서’)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발간되며 동아시아 사상계를 흔들었다.

    ‘량치차오 시대’

    량치차오는 여섯 살에 오경五經을 완독하고, 열두 살에 수재가 되고, 열일곱에 거인擧人이 된 천재였다. 구학문의 천재였던 량치차오는 1890년 회시會試에 낙방했다. 낙담한 그가 새롭게 성장한 계기는 스승 캉유웨이와의 만남이었다. 신학문에 눈을 뜬 그는 1895년에 캉유웨이를 도와 [만국공보萬國公報]를 창간하고 본격적인 변법운동에 들어선다. 1898년에는 캉유웨이와 함께 이른바 ‘백일유신’을 시작했다. 그러나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서양 사상을 직접 접하며 쓴 글들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날로 명망이 커졌다.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량치차오는 1912년에 귀국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며 정치일선에서 활동하면서, 위안스카이 등이 주도한 복벽주의에 반대했다. 1919년부터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강연과 저술에 몰두하다 사망했다. 량치차오가 1895년 [만국공보]를 창간한 뒤 1929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35년 동안을 중국 100년 언론사에서는 ‘량치차오 시대’라고 부른다. 그의 막대한 영향력을 잘 보여주는 영예로운 호칭이다.

    중국 언론계의 총아가 구상한 근대 문명과 동학東學

    [자유서]는 구학문에 대한 탄탄한 기반을 지닌 량치차오가 망명지 일본에서 신학문을 왕성하게 섭취하며 동서 사상의 가교를 구상한 책이다. 중국 내외에서 ‘언론계의 총아’로 불렸던 그의 명성에 걸맞게, 문명 구상에서 일상의 단상까지, 중국의 고전과 불경에서 몽테스키외·홉스·스피노자·루소·다윈·스펜서 등 서양 사상가까지 다양한 주제를 빠른 행마로 종횡했다. 제목처럼 ‘자유’롭고 분방하다. [자유서]란 이름이 그 때문에 붙은 것은 아니다. 제목은 존 스튜어트 밀의 저술에서 따왔다. 량치차오는 [서언] 말미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인간사회의 진화에서는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이 3대 자유는 모두 나에게 갖춰져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자유서’라는 책 제목을 거기서 따왔음을 밝히고 있다.

    [자유서]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은 근대 문명과 국가 개혁에 관한 것이다. 문명, 자유와 민주, 국권과 민권, 국민, 법과 법제, 여론과 신문, 개혁을 향한 의지, 개혁에 필요한 자세, 개혁의 방법과 이론 등이 그것이다. 또 영웅호걸과 위인, 부국강병, 군대, 무사도와 상무정신 등도 그 범주에 속한다. 이 글들을 통해 서양과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장점을 직접 접하고 중국 또한 근대 국민국가로 발돋움하기를 바라는 량치차오의 기대를 읽을 수 있다. 한편 량치차오는, 일반적으로 근대 중국 지식체계의 전환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 [자유서]는 그렇다면 지식체계의 전환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두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하나는 서양 개념의 소개다. 문명과 야만, 자유와 민주, 국권과 민권, 국가와 국민, 군대, 법, 신문, 여론 등 근대 문명에 관한 기본 개념들이 소개되고 있다. 서양 서적의 번역과 개념의 수입에는 당시 다른 학자들도 물론 기여했지만, 량치차오만큼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풍조를 연 인물은 드물었다. 둘째, 개념과 사상의 수입이 량치차오의 선택과 해석을 거쳤다는 점이다. 량치차오의 망명지에서의 단상을 통해 우리는, 무술정변 이후 새 학문에 대한 중국 지식인의 갈망과 서학을 소화시켜 중국인의 ‘동학東學’으로 만들려는 고민과 흔적을 풍부히 살필 수 있다.

    한국에서 [자유서]의 소개

    량치차오의 저술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다. 소개된 저술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었다. 하나는 량치차오의 역사 단행본 작품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현채 역, 1906),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신채호 역, 1907)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문집과 소품류다. [황성신문] 1906년 11월에 [음빙실문집]과 [자유서]가 나란히 소개되었고, 이어 [중국혼中國魂](장지연 역, 1908) 등이 소개되었다. 말하자면 [자유서]는 1906년 말에 문집과 함께, 상당히 높은 지명도를 가지며 소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에는 1907년까지 [자유서]에 속한 소품들이 [대한자강회월보], [태극학보], [서우] 등의 학회지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자유서]에 대한 사회적인 수요가 어느 정도 충족되자 1908년 두 권의 책이 본격적으로 출판되었다. 하나는 ‘탑인사본 [자유서]’(현공렴 발간, 1908)이고 다른 하나는 ‘언해본 [자유서]’(전항기 역, 1908)다. 전자는 중국본을 영인한 것으로 총 66편이 수록되었고, 후자는 65편을 언해하여 수록했다. 언해본의 등장은 량치차오가 가졌던 대중적인 인기를 잘 보여준다.

    신지식인의 환영과 구학문의 반발

    한국의 근대 지식인 사이에서도 량치차오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먼저 소개된 역사·전기류는 변법과 애국, 자강을 지향하는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후 소개된 량치차오의 문집과 [자유서] 등의 소품은 서양 사상의 핵심 개념의 이해와 국가 개혁의 방향과 관련해서 많이 읽혔다. 그리고 대중화될수록 찬반양론이 있었다.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음빙실문집]을 한문 교과서로 사용한 일은 유명하다. 안창호와 같은 계열에 있던 신지식인들은 ‘(상류 사람들의) 심성 개량의 속성과速成科’로 소개하고 있다. [자유서]에 실린 글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한 지식인은 박은식과 장지연이었다. 박은식은 자신이 주필로 있던 학회지 [서우](1906.12.~1907.12.)에 연달아 소개했다. 장지연 또한 [대한자강회월보]와 [조양보]에 소개했다. 구학을 지지하는 유학자들의 반대는 격심했다. 대한제국기의 큰 유학자였던 전우, 곽종석, 유인석 등이 모두 량치차오를 비판했다. 그들은 량치차오를 불교와 기독교를 섞어 쓴 이단이고, 왕도와 패도를 혼용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유인석은 [자유서]에 대해 "한 고조, 명 태조를 큰 도적이라 비난하고, 예악을 강압적인 제도라고 비판하는 등 고금에 들어보지 못한 괴이하고 패륜한 책자이므로 다시는 읽지 않았다"고 혹평했다.

    110년 만의 완역과 정본화

    [자유서]는 1903년 상하이 광지서국에서 처음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이후 중국에서는 1936년에 발간된 [음빙실합집] 2책에 몇몇 편이 추가되어 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1904년에 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1908년에 언해본이 발간되었다. 이번의 번역은 1903년에 발간된 광지서국본을 기본으로 하여 다섯 종류의 판본을 모두 비교하고 보충해 완역하고 정본定本을 만들었다. 번역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이 담당했다. 한림과학원은 2007년부터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으로 인문한국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림과학원의 아젠다는 ‘동아시아 기본개념의 상호소통 사업’으로, 학계에서는 이른바 ‘동아시아 개념사 연구’로 통하는데 그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했다.

    번역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인력은 모두 13명이다. 작업 기간은 중국사상 전공자인 강중기·양일모 교수를 중심으로 중국사·중국문학, 한국사·한국철학 전공자가 참여했다. 한문 전공자가 주축이지만 일본근대사상, 서양사, 국문학 전공자 등이 참여한 것도 이채롭다. 작업 기간은 총 6년이 소요되었다. 초벌 번역과 재벌 번역에만 4년이 걸렸고, 2년간 강중기·양일모 교수가 꼼꼼하게 교정했다. 판본 비교 및 꼼꼼한 주석도 주목되고, 량치차오 사상을 소개한 해제와 한국 수입을 소개한 해제 2편도 눈에 띈다. 번역자들은 "량치차오가 서양의 원저를 자기 방식대로 소개하다 보니 어디서부터가 원전이고 어디서부터가 량치차오의 서술인지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고, 백화문과 고전한문이 뒤섞이고 중국 고전을 마음대로 활용해 이를 일일이 확인하고 원사료를 복원하는 일이 힘들었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량치차오의 저술이, 한국에서 끼친 영향력에 비해, 번역이 턱없이 빈약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소개


    량치차오


    저자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중국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근대 전환기를 살면서 끊임없이 시대를 이끌어간 대표적 지식인이다. 신문·잡지 및 교육을 기반으로 변법유신變法維新을 도모하고, 근대화된 서구 문명을 선전함으로써 폐쇄된 근대 중국에 새로운 개혁의 기풍을 일으켰다. 특히 탁월한 계몽주의 사상가, 정치가, 언론인, 교육자, 문학가로서 중국 문화사文化史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자字는 탁여卓如, 호號는 임공任公이며, 필명筆名으로 음빙실주인飮?室主人·음빙자飮?子·만수실주인曼殊室主人·신민자新民子·소년중국지소년少年中國之少年 등 여럿을 사용했다.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항의 최전방 지역이던 광둥 성廣東省 신후이新會 사람으로, 반경반독半耕半讀의 향신鄕紳인 아버지 량바오잉梁寶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치同治 12년(1873), 즉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33년 뒤,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지 10년 뒤, 서구 충격이 중국을 향해 거세게 가해지던 시기다. 여섯 살에 오경五經을 완독하고, 열두 살에 수재가 되었으며, 열일곱에 거인擧人이 된 천재였다. 하지만 1890년 회시會試에 낙방하면서 실의에 빠진 그가 새롭게 성장한 계기는 스승 캉유웨이康有爲와의 만남이었다. 신학문에 눈뜬 그는 1895년 당대 뛰어난 대학자 캉유웨이를 도와 《만국공보萬國公報》를 창간하고 본격적인 변법운동에 들어선다. 1898년 캉유웨이와 함께 이른바 ‘백일유신’을 시작했으나,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서양 사상을 접하며 쓴 글들을 자신이 직접 창간한 여러 잡지에 연재하면서 그의 명망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 특히 《청의보淸議報》에 실린 글들은 뒷날 《음빙실자유서飮?室自由書》 편찬으로 이어졌다. 중국 내외에서 ‘언론계의 총아’,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린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음빙실자유서》는 구학문에 대한 탄탄한 기반을 지닌 량치차오가 망명지 일본에서 신학문을 왕성하게 섭취하며 동서 사상의 가교를 구상한 책이다.

    신해혁명 다음 해인 1912년에야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정부에서 사법총장司法總長, 폐제국총재幣制局總裁, 재정총장財政總長 등 각종 직책을 맡아 정치 활동을 했고, 말년에는 중국의 역사와 학술을 중심으로 한 연구 활동에 주력했다.

    그 밖의 주요 저술로는 《소년중국설少年中國說》, 《중국역사연구법》,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신민설新民說〉, 《리훙장전李鴻章傳》 등이 있으며, 량치차오가 생전에 편찬한 《음빙실문집飮?室文集》에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한 단편들이 더해져 《음빙실합집飮?室合集》(중화서국, 1936)이 출판되었다.

    역자 : 강중기
    역자 강중기: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전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중국철학)

    역자 노관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전 한림과학원 HK교수(한국사)

    역자 박근갑: 전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독일사)

    역자 서광덕: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 전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중국문학)

    역자 서병철: 한림과학원 HK연구보조원(중국철학)

    역자 송인재: 한림과학원 HK교수(중국철학)

    역자 양일모: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전 한림대학교 철학과 교수(중국철학)

    역자 이경구: 한림과학원 HK교수(한국사)

    역자 이병기: 한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국어학)

    역자 이예안: 한림과학원 HK교수(일본사상사)

    역자 이행훈: 한림과학원 HK교수(한국철학)

    역자 최재영: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중국사)

    역자 허 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전 한림과학원 HK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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